Sunday, August 9, 2026

 초대받지 않은 손님

《체어맨》 2부


[ 주소를 따라 랜초 서클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을 한 번 돌 때마다 대지는 더 넓어지고, 담장은 더 높아지고, 거리는 더 조용해졌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문명의 부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명이었다.

드디어 높은 돌담과 검은 철제 대문을 갖춘 거대한 저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감히 ''이라고 부르는 건 실례인것 같았다. 독립된 그들만의 하나의 나라에 가까웠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조경을 갖춘 저택이 내가 찾던 주소였다.

나는 길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그리고 한참을 그냥 그렇게 차 안에서 넋놓고 앉아만 있었다.

과연 내 편지를 읽긴 했을까? 아니, 그의 비서의 비서라도 읽긴 했을까?

어쩌면 내 페덱스 봉투는 아직 누군가의 책상 위에 뜯지도 않은 채 처량하게 놓여 있을지 모른다. 또는 서류 분쇄기속에 또는 쓰레기통속에..

한편, 내가 혹시 엉뚱한 사람을 찾은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허풍쟁이 친구놈이 준 주소니까. 친구놈은 지금 이순간까지도 여전히 신뢰가 안 간다.

백번 양보해 집주인 이름이 맞다면, 하필 동명이인 은퇴한 치과의사가, 웬 낯선 녀석이 보낸 편지 여섯 장과 시나리오 뭉치를 보고 당황해 하고 있지는 않을까.

초대도 안 받았는데 일방적으로 방문을 통보한 걸 두고 벌써 경찰에 신고했을지 모른다. 나같아도 그럴것 같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저 다행히 민망한 일로 끝나고, 기껏해야 경찰에게 해명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제대로 찾은 거라면, 그건 훨씬 더 엄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명이인 치과의사 차원의 해프닝을 한참 넘어선다.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야 해피엔딩을 꿈꾸지만, 정작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준비되어 있고, 나는 그 끔찍한 곳을 지금 차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사막 공기는 폐를 사포로 문지르는 것처럼 건조했다.

저택의 대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내 상상력은 그날 저녁을 망칠 새로운 방법을 하나씩 더 찾아내는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으면 어쩌지? 진실은 사실 더 위험하다. 거짓말이 어떤 경우에는 훨씬 안전하다.

지난 몇일 동안 나는 카지노 직원들, 호텔 매니저들, 은퇴한 운전기사, 그리고 어쩐지 꽃집 주인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걸 알고 있던 한 플로리스트를 통해 소문을 쫓아다녔다. 그의 집주소 말이다. 친구놈이 준 주소를 크로스첵 하기위해서.. 그때는 그걸 '끈기'라고 생각했다.

꽃집 플로리스트가 결정적이었다. 친구놈이 준 정보와 대략 일치했다.

 

인터콤 앞에 섰다. 작은 CCTV 카메라가 아래쪽으로 기울어지며 렌즈가 정확히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누르려 손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내가 다닌 뉴욕의 영화학교에서는 예산, 렌즈, 스토리 구조 같은 건 가르쳐줬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이야기하는 남자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그 쉬운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바로 그때였다, 옆집 저택의 쪽문이 열렸다. 웬 여자가 프렌치 불독을 데리고 걸어 나왔다. 값비싼 동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우아함을 갖춘 여자다.

그녀는 나를 한 번 쳐다봤다. 결코 친절한 눈빛은 아니었다. 살짝 경계하는 듯한 눈빛마치 내가 하루 일찍 도착한 내일 자 경찰 보고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최대한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 아무런 반응없이 나를 외면했다. 살찐 불독이 그녀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간다.

 

그런데 그 고상하고 냉랭한 여자와 달리 그 잘생긴 불독은 나를 계속 뒤 돌아 봤다. 목줄에 끌려가면서도. 마치 내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는 듯한 물끄럼한 표정.  역시 개는 우리의 사랑스런 친구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난 외롭지 않았다.

특히 갈랫길 중간쯤에서는 멈춰서 여자가 목줄을 당겨도 끌려가지 않고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듯 했다.  

힘든 하루지?’ ‘나도 그래.’ ‘우린 참 비슷한거 같아. 너를 이해해. 행운을 비마.’

 

나는 그때 그 개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분명 그 개와 나는 서로 동병상련의 텔레파시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순간, 모든 외교 관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 못생긴 개새끼가 미친 듯 나를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날 물어죽이거나 잡아먹을 것처럼 말이다.

 

그 작은 미치광이는 내가 자기 조상 대대로 모욕이나 한듯이 목줄을 끊고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올 것처럼, 온몸이 분노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여자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침착하게 개를 끌어 당겼다.  반면 나는 남은 마인드 컨트롤을 전부 내던지고 옆집 담벼락에 몸을 붙였다.

개가 나를 물어 죽일듯 짖는 소리가 고요한 저택 타운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려던 내 계획은 그걸로 산산조각났다.

여자와 개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얼어붙은 듯 꼼작없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심장 박동이 의료적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그 어처구니 없는 개의 돌발행동이 뜻하지 않게 나에게 도움을 준 셈이다.

바로 직전까지 나는, 마피아들이 파놓은 얕은 무덤, 그리고 네바다 사막에서 흔적 없이 내가 사라지는 온갖 방법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30파운드 될까말까한 불독한테 조차 나의 긍지와 체면을 잃고 나니,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 집 대문 앞으로 멋있게 당당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인터콤 버튼을 힘 주어 여러번 눌렀다. 열번은 계속 누른 것 같다.

그러자, 잠시 있다 문이 열리는 모터 소리가 들렸다.  철제 대문이 미끄러지듯 열리기 시작했다.

창살 대문 사이로 원형 진입로가 넓은 석조 안뜰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게 보였다. 그런데 안뜰 한가운데 웬 헬리콥터 한 대가 세워져 있는게 아닌가.

멀리 보이지만, 짙게 선팅된 창문, 강화된 패널 그리고 헬기 옆면에 매달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장비들. 커다란 장막으로 대충 덮어 놨지만 특별히 주목하고 보면 보였다.

 

헬기의 기수는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헬기 옆에 붙어있는 이상한 장비들의 차가운 질소 가스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게로 불어왔다. 

그걸 보면서 이 집에 들어가서 쓸데없이 이것저것 묻는 건 매우 적절치 않은 질문이 될거라는걸 직감 했다.

드디어 철제 대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러자 저만치 저택 현관 입구에서 어떤 남자가 밖으로 나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혼자였다.



《체어맨》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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