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4, 2026

 빈 의자

《체어맨》3부


[ 남자는 혼자 안뜰을 가로질러 왔다.

안뜰의 불빛 아래로 윤이 나는 검은 구두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회색 정장과 넓은 어깨, 잡담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 나타났다.

체어맨은 아니었다. 서른다섯에서 마흔쯤 되어 보였다. 목과 어깨가 굵었다.]

이름.”


[ 나는 이름을 말했다. 남자는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설명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여섯 페이지에 걸쳐 설명을 우편으로 보냈었다. 진입로에서부터 일곱 번째 페이지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동차 열쇠.”

왜요?”

돌아갈 때 돌려줄거요.”


[ 나는 열쇠를 건넸다.그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내 몸을 수색했다. 내 주머니에서는 지갑과 펜 두 자루, 성냥갑, 구겨진 영화표 반쪽이 나왔다.위험해 보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쪽으로.”


[ 그가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때 헬리콥터 옆을 지나 그를 따라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민간용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프로펠라 날개 아래에는 관 모양의 발사관이 두개씩 달려 있었고, 기수 아래에는 여러 개의 총열을 가진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저예산 액션영화 현장을 충분히 겪어봐서기관포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

저거 합법입니까?”


[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방금전 이 집 철문 밖에서 했던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위반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된다. ]  

질문 취소하겠습니다.”


[ 현관 홀은 내가 처음 살았던 아파트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넓었다. 대리석 바닥에는 두 층 높이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이 비쳤다. 벽에는 사막을 그린 유화들이 걸려 있었다.

나는 미술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집에는 가짜일 만큼 값싸 보이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어두운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복도 곳곳에 여기저기 보였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우리는 멋진 조각이 새겨진 커다란 나무 문 앞에 멈춰섰다. 바로 문이 열렸다.

문 너머의 방은 의외로 소박했다. 책장과 돌 벽난로, 낡은 가죽 소파가 있다.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문 옆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의자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하나는 비어있고. 다른 의자에는 한 노인이차분히 앉아 있었다.

흰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넥타이 없이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체격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랄까. 그 집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그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앉은 의자 옆 탁자위에 놓인, 내가 보낸 페덱스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는 개봉되어 있었다. 편지 여섯 페이지 전부에 밑줄과 손글씨 메모가 빼곡했다. 체어맨은 잠시 말없이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말랐군.”

영화 제작비가 끊기면 식비가 먼저 앞서가서요.”

앉게.”


[ 나는 맞은편 빈 의자에 슬며시 앉았다. 나를 따라왔던 남자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체어맨이 그들을 바라보며 턱짓을 한다. 그러자 저택 대문에서 부터 나를 인도했던 남자가 반걸음 앞으로 나왔다.]

회장님, 아직 신원확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끝냈어. 모두나가.”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 체어맨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즉시 남자들이 모두 방을 나간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남자들이 전부 나를 돌아다 보았다. 둘이 남은 공간, 나한테는 공기가 무거웠다.

최대한 자신감이 넘쳐야한다. 그리고 반드시 위트 있어야하고, 그렇다고 너무 말이 많거나 쓸데없는 질문하면 안되고. 그렇게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있던 그때, 체어맨이 내 편지 첫 장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항상 이렇게 길게 쓰나?”

돈이 없을 때만 그렇습니다.”

돈이 생기면?”

그때는 편지 대신 영화를 만들 겁니다.”


[ 재치있는 답변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웃지않았다. 내 편지를 내려다보며..]

내 돈이 필요하다고 썼더군. 그리고 목요일 저녁에 찾아올 테니 내가 시간을 내야 한다고 통보했어. 목요일이 내게 편한 날인지 묻지는 않았고.”

물어보면 거절하실 기회를 드리게 될 것 같아서요.”

내가 거절했다면?”

직접 와서 듣고 싶었을 겁니다.”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계속 벨을 눌렀겠죠.”

언제까지?”

금요일까지요.”


[ 나는 그때 내가 지금 페이스 조절에 문제가 있다는걸 느꼈다.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윙윙 울리고 있다. 나는 지금 체어맨과 티키타카하러온게 아니지않나.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않고 있다.]

두려운 게 있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왔군.”

용기란 겁에 질려도 주차비는 내는 거라 생각합니다.”


[ 그의 시선이 잠깐 창밖 바깥 뜰의 헬리콥터로 옮겨갔다. ]

우리는 주차비를 받지 않아.”

그렇다면 이번 미팅은 벌써 대부분의 스튜디오 미팅보다 잘되고 있군요.”


[ 잠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 아래에 짙은 그늘이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어도 잠까지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가 내 편지로 자신의 한쪽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내 영화와는 아무 관련없는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살아 계신가?”

.”

사이는 좋고?”

거리를 두면요.”

어느 정도 거리?”

네바다 사막 정도의 넓이면 적당합니다.”


[ 그제서야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그리고 마치 기억 속의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듯 내 얼굴을 살폈다.]

아버지를 미워한 적 있나?”

스무 살 넘긴 남자 중 아버지를 한 번도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 체어맨이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 사이의 탁자 위에는 은제 담배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는 뚜껑을 열지 않은 채 엄지손가락으로 그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한쪽 모서리에는 알파벳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D.” ]

그 미움은 얼마나 오래가지?”

아버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할 때까지 아닐까요.”

그다음에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일지도 모르고요.”


[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지며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자 내 이성은 이제 더 이상은 위험해. 제발 이제 말을 멈추고 입 닥쳐!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때 어디에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셀폰이 아니다. 돌아보니 다른 탁자에 놓인 유선전화였다. 

동시에 노크도 없이 갑자기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이방에 있다가 나간 남자들이 손에 무전기를 들고 우루루 밀려 들어왔다. 긴장한 얼굴들이다.]

회장님. 피하셔야 합니다

누구야?”


[ 남자들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체어맨의 목소리도 차갑게 굳어있었다.]

연락이 왔습니다.시카고입니다.”

뭐라고?”

데이비드를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 체어맨의 얼굴에 분노가 보였다. 그때 밖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라와 엔진이 살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신간에 기계음이 높아져간다. 로터가 돌기 시작했고, 중무장 헬기의 프로펠라 소리가 마치 테이블 위의 카드가 한 장씩 돌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뜰에 있는 그 헬기의 로켓포와 기관포의 질소가스 냄새가 이 방안까지 밀려와 진동하는것 같았다

체어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긴장하거나 당황한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화난 표정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를 힐긋 보며 말한다.]

우리 대화는 미뤄야겠군.”

이자는 어떻게 할까요?”


[ 남자 둘이 내 옆으로 바짝붙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 중 하나는 내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야말로 어리둥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분위기 나쁘지 않았는데, 한 순간에 상황이 돌변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잘못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이자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한 말이 두렵다.

보통 영화에서는 그런 대사가 있을 경우 결과가 않좋은게 너무나도 뻔한 크리셰아니던가. 체어맨은 열린 문쪽으로 걸어간다. 그러다가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지 않은채 말했다.]

만약 내게 거짓말한 게 있다면 여기 남겨둬..



《체어맨》 4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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