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분명, 어쩌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남자
- 농담으로 시작한 캐스팅 제안서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 이야기 -
먼저 밝혀둘 게 있다.
헐리웃 스타 배우 ‘코너 도일’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정말 단 한 번도.. 서로
겹치는 친구도 없고,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으며, 술집
화장실에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같은 말을 주고받은 적조차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완벽히 모르는 사이다. 그런데 말이다. 조금만 들어보시라.
나는 코너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두 동네쯤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 그와
나의 고등학교 시기는 정확히 겹친다. 체육관 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가끔 다른 학교 아이들과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던 시절의 보스턴이었다.
그의 옛 인터뷰들을 보면 코너는 우리집에서 내가 걸어 갈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거기다 나이도 같다면 이런 기막힌 우연이 어디있겠나. 뭔가 운명적이지
않나? 광활한 우주에서, 그것도 하필 지구에서, 이 넓은 미국에서, 더욱이 보스턴에서 말이다.
이런 인연은 흔치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만났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확률이 좀 수상하다.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갑자기 담배를 배우지는 않는다. 그런
못된 습관은 대개 훨씬 일찍 배운다. 그리고 그런 습관에는 장소가 있다. 조명은 어둡고, 판단력은 그보다 더 어두운 곳.
마침 내 친구 하나가 코너 학교에 다녀서 나는 그쪽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는 가끔 그 학교 아이들에게 담배를 ‘빌렸다’.
물론 여기서 ‘빌렸다’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보통 빌린다는 말에는
언젠가 돌려주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계획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싸움도 자주 났었다. 물론 학생신분으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어딘가에서 코너와 한두 번쯤 스쳐 지나갔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서로 통성명을 못 했을 뿐이지, 어쩌면 그 시절 우리 둘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또는 서로에게 얻어 맞을까봐 쫓기며 도망가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시절 보스턴 어딘가에는 두 아이가 있었다. 엇비슷한
동네. 같은 환경. 서로 누군지도 모른 채 어쩌면 몇 번이나
서로 스쳐 지나갔을 두 남자 아이.
그리고 수십 년 뒤, 희안하게도 둘 다 영화판에 들어왔다. 코너는 당당히 카메라 앞에 섰고, 나는 그와 다른 시간대를 지나
같은 업종에서 돈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카메라 뒤에 돈 좀 넣어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확률이며 운명의 장난일까? 오직 신만 알뿐이다. 내가 코너를 좋아하게 된 건 이런 인연을 생각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가 아직 젊은 배우였던 시절, 모두가 어려워하던 감독에게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배우를 가끔 ‘까다롭다’고 부른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견고히 가지고 촬여 현장에 왔고, 상대가 더 힘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생각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버리지 않는 투철한 철학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더 마음에 든다. 물론 이런 생각도 해봤다.
고등학교 시절에 어떻게든 코너를 찾아내 친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몇십 년 뒤 내가 보내게 될 이 황당한 편지도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코너, 야 임마 오랜만이다. 대본
하나 보낼게 OK?.” 이 얼마나 간단한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다.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 뿐이었다.
남들 눈에는 내가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왜
그 좋은 엄청난 운명적 인연의 관계를 마다하고 굳이?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세상에 좋은 배우가 코너
하나뿐인 건 아니다.
파치노도 있다. 드니로도 있다.
덴젤도 있다. 잘 부탁하면 디카프리오도 와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그들을 만나본적이 없다. 그래서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다시말해 나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거다. 그래도 첫 번째는
코너였다. 나와 엄청난 인연이 있는 그에게 최우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사람은 의리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자, 이제 정말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자.
나는 몇 년 동안 특수부대 스릴러 한 편을 붙잡고 있었다. 가능하면
실제 장소에서 찍고 싶었다. 그 대본은 내가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살아남았고, 하드디스크 두 개가 죽는 동안에도 살아남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수정과 퇴짜를 견뎌냈다.
심지어 어느 미팅에서는 내 대본을 보고 상대방이 20분 동안 엄청난
열정으로 자기 의견을 늘어놓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 대본이 아닌 다른 작가가 쓴 대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 대본은 정말 수없이 많이 거절당했다. 몇 번인지는 세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건 아직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거다. 이게 좋은 징조인지, 아니면 내가 지독하게 고집이 센 인간이라는 증거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지 모른다.
나는 코너가 내 대본 첫 페이지도 읽기 전 부터 출연료나 계약 조건 따위을 들이미는 방식으로 그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서로간의 ‘운명적 인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그를 원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내가 설명할 게 아니라 대본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탁은 단순하다. 한번 읽어봐 달라. 장르가 액션이라서 육체적으로 힘들어 보인다고 미리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얼마나
뛰어야 하는지, 얼마나 넘어져야 하는지, 얼마나 진흙탕을
굴러야 하는지, 얼마나 소리 지르고 고생해야 하는지 그런 것부터 계산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캐릭터만 봐 주면 충분하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천천히
판단해달라고.
내 작품은 겉으로 보면 꽤 요란한 영화다. 특수부대가 나오고, 인질 사건이 벌어지고, 총격전이 있고, 예고편에 넣으면 그럴듯할 장면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 요란함 밑에 다른 영화 한 편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배우가 아닌 코너라면 그걸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조금 과한 욕심도 있다.
나중에 기자들이 그에게 이렇게 묻길 바란다. “그 작품은 대체 왜 하신 겁니까?”
코너.
생각해보면 우리는 열일곱 살 무렵부터 계속 ‘거의’ 만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같은 보스턴의 한 귀퉁이에서 자란 두 남자.
같은 시대, 시간을 지나왔고, 비슷한
거리를 걸었으며, 어쩌면 어느날 같은 편의점 계산대 앞에 줄을 섰을 수도 있지않았겠나. 학교 근처에서 어깨를 스쳤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단 한 번도 우린 가까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건 이제 와서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각기 자란 동네에서 출발한 누군가가 노력으로 멋있게 멀리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
그리고 또 하나도 안다. 25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대본 한 편씩 붙잡고 역시 멀리 서 있는 나의 기분.
이상하게도 나는 자네 코너를 보면 질투보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정확히
말한다면 일종의 증거 같다. 우리 철없던 고교시절 출발했던 한 사람이,
그 당시 우리 주변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곳까지 갈 수 있다는 증거.
나는 부디 자네 코너가 내 대본을 꼭 읽기를 바란다. 그런데 편지를
쓰다 보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자네와 서로 마주 앉아 위스키를 두 잔 따르고 싶다. 아직
만들지 않은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말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옛날 보스턴 이야기를 하는 꿈을 꾼다.
“너 혹시 그때 그 학교 앞 편의점 알지?”
“알지.”
“거기 자주 갔어?”
“갔지.”
그러다 정말 우리가 같은 장소에 있었던, 그 어느날 하루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네가 내 담배를 빼앗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네 담배를
빼앗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둘은 서로 근처에서 담배를 피워본 적조차 없고, 내가
지금까지 늘어놓은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헛소리일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네가 내 작품을 거절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 거절쯤이야 나는 이미 꽤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코너. 네가 혹시 지금 이 순간 만약 내 대본을 읽고 있다면, 이제는 그걸 한번 바꿔보고 싶다. 우리가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경우 말이야.
어려운 일이 아닐거야. 우리가 전혀 만난적 없더라도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을테니까. 우리의 만남이 정작 없었더라도 바꿔보고 싶다.
좋은 판단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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